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화조 사건 (문단 편집) == 광란과 공포 == 이 사건에 대한 당시의 북한 풍경은 한 마디로 "광풍" 그 자체였다. [[룡성구역]]에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서북청년회]] 특공대원들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이 논리가 참 단순무식한 것이 '''6.25 때 북으로 왔으니 지금으로 치면 70대를 넘었을 것이라는 계산법이었다.''' 그들도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하고 그리고 총살당했다. 이렇게 자그마치 2년 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2만 명이었다. 어떻게나 많은 사람들이 잡혀들어왔던지 아예 관리소를 새로 지어야 했을 정도였다. 평양의 중앙기관 간부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2년 동안 찍 소리 못하고 살아야 했다. 참고로 김일성 일가를 착취했다고 알려진 최지주의 남은 일가에 대한 제거 역시 집행되어져 모든 일족이 총살형을 당했다.[* 정말 착취를 했던 최지주인지 아니면 엉뚱한 사람을 잡았는지는 알수 없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범행 대상이 서북청년회 외에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하고 거기에 공화국 영웅칭호와 훈장까지 받은 사람까지 포함되었다.'''[* 이 당시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이들까지도''' 부관참시하고 후손들을 총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처형을 받기 전에 취조 중에 자살했다고 한다. 실제로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혹은 고문 중에 죽은 사람을 자살했다고 조작한 사례도 있었다. 워낙 많은 인원을 체포하다 보니 빠른시간 내에 자백을 받아야 했고, 이 때문에 심화조가 자행한 고문은 잔인함의 극치를 달렸다. 심지어 잡혀온 사람이 고문 도중에 사망해도 시체를 그냥 유기했다고 한다. 여러 고문들 중 한 예를 들면 피해자의 양팔과 양다리를 뒤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놓고 군화발로 늑골을 걷어차면 늑골이 부러지는데, 자백을 하지 않으면 부러진 부위를 계속 걷어찼다고 한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부러진 뼈가 내장에 박혀 피해자는 내출혈로 사망했으며 치료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죽은 사람의 몫까지 자백을 시키면 되기 때문에 고문은 갈수록 잔인해졌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최고 거물이었던 문성술은 고문 중에 사망했는데, 채문덕은 자백을 받기 전에 문성술이 이미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사체에서 손가락을 잘라서 자백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그 정도로 심화조 사건은 무법의 극치를 달렸다. 심화조가 적발해낸 '간첩들'이 워낙 많아서 공개처형이 힘들어지자 심화조는 감옥에 총살대를 보내 감옥에서 곧장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이 모든 학살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장성택]]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